HJ중공업 도크는 300m, 700m 도크는 다른 회사가 산다
HJ중공업 도크는 300m, 700m 도크는 다른 회사가 산다
HJ중공업(097230) 부산 영도조선소의 도크는 300m입니다. 올해 3월 인수 합의각서가 오간 HD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도크는 700m급입니다. 그 700m 도크를 사는 쪽은 HJ중공업이 아닙니다.
HJ중공업은 9월 22일 오세아니아 선주와 약 6,790억원 규모의 컨테이너선 4척 건조계약을 공시했습니다. 계약 기간은 2026년 9월 21일부터 2029년 4월 30일까지이고, 대금은 공사가 나아가는 만큼 나뉘어 들어옵니다.
HJ중공업은 300m 도크 안에서 배를 키워 팔아 온 회사이고, 그 벽을 넘을 큰 도크는 회사 밖 대주주 쪽 법인으로 갑니다. 이번 계약서에 이름을 올린 것은 700m가 아니라 300m의 회사입니다. 큰 수주 소식과 큰 도크 소식이 한 회사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두 소식의 주인은 다릅니다.
도크는 그대로였고, 배가 도크에 맞춰 커졌다
2004년 HJ중공업의 전신 한진중공업은 영도의 300m 도크에서 325m짜리 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답은 물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선체를 이을 자리에 댐 같은 구조물을 세우고, 도크 바깥 바다 쪽에서 선체를 용접해 붙였습니다. 그렇게 나온 배가 20피트 컨테이너로 8,000개를 싣는 8,000TEU급이었습니다.
2025년 HJ중공업은 댐 공법 없이 9,000TEU급 메탄올 추진 컨테이너선을 지어 인도했습니다. 도크 밖에 공정을 하나 더 붙이던 조선소가, 도크 안에서 끝나면서도 더 많이 싣는 배를 설계하는 쪽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 사이 상선 주문도 돌아왔습니다. 해군 함정과 관공선 같은 특수선으로 영업하던 영도는 2021년 10월 유럽 선사의 5,500TEU급 4척으로 2015년 이후 6년 만에 일반 상선을 수주했고, 2022년 동형선을 더 받아 같은 배가 6척이 됐습니다. 2024년 2월 그 가운데 ‘짐 양쯔’와 ‘짐 미시시피’가 영도에서 이름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에는 HMM이 빌려 운항하는 7,700TEU급 LNG 이중연료 컨테이너선 ‘HMM OCEAN’과 ‘HMM SKY’의 명명식이 열렸습니다.
2026년 2월 처음 수주한 10,100TEU급 모델은 영도 도크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급 제원으로 개발됐습니다. 기존 모델을 바탕으로 갑판과 화물창의 적재 공간을 넓혔고, 4월에는 같은 규모 2척을 더 받았습니다.
날짜를 겹쳐 놓으면 순서가 보입니다. 영도 최대 제원의 첫 수주가 2월, 군산조선소 합의각서가 3월 13일, 같은 배의 추가 수주가 4월입니다. 큰 도크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에도 HJ중공업이 판 것은 300m에 맞춘 배였습니다. 이 회사는 도크를 늘리지 않고 한 척에 싣는 양을 늘렸습니다. 도크 한 칸이 받아 낼 수 있는 주문의 크기를 설계로 키운 셈입니다.
영도 밖 조선소 하나가 한진의 30년을 끝냈다
한진중공업 시절, 이 회사에는 영도 밖에 2조원을 들인 조선소가 있었습니다. 필리핀 수빅조선소입니다.
수빅은 조선업 불황 속에 3년 연속 적자를 냈고, 2019년 1월 현지 은행이 4억1000만달러(약 4,600억원) 상환을 요구하며 현지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습니다.
빚은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한진중공업이 서 준 지급보증이 현실이 되자 자본총계가 자본금 대비 -140%, 완전자본잠식으로 떨어졌습니다. 2019년 2월 13일 주식 거래가 멈췄고, 회사는 상장폐지 실질심사 문턱에 섰습니다.
채권단의 6,874억원 출자전환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창업주 조중훈의 아들 조남호 회장은 2019년 3월 이사회 재추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30년 경영이 거기서 끝났고, 최대주주는 한진그룹 계열 지주사에서 산업은행 등 채권단으로 넘어갔습니다. 2021년 4월 15일 동부건설 컨소시엄이 채권단 지분 66.85%를 사들이는 계약을 맺었고, 그해 12월 22일 사명이 HJ중공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수빅에서 잃은 것은 조선소 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바다 건너 조선소의 적자가 보증 한 줄을 타고 본사 자본을 지웠고, 오너 일가는 회사를 잃었습니다. 조선소와 본사를 무엇이 잇고 있느냐가 회사의 운명을 가른다는 것을, 이 회사는 한 번 겪었습니다.
군산 700m 도크를 사는 쪽은 HJ중공업이 아니다
HD현대중공업이 2026년 3월 13일 군산조선소 자산 양수도 합의각서를 맺은 상대는 HJ중공업이 아니라 그 최대주주 에코프라임마린퍼시픽이었습니다. 부지 약 54만평에 700m급 도크, 1,650톤급 골리앗크레인을 갖춘 조선소입니다. 본계약은 같은 대주주 계열의 별도 법인 제이오션중공업이 맺고 인수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따질 것은 인수 금액이 아니라 누가 사느냐입니다.
그려지는 구도는 영도가 중형을, 군산이 대형을 맡아 대한조선 등이 겨루는 대형선 시장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구도에서 대형을 맡을 설비는 HJ중공업 법인 밖에 있습니다. HJ중공업 주주에게 군산은 자기 회사의 설비가 아니라 대주주 쪽의 다른 회사입니다. 700m 도크가 벌어들일 돈도, 짊어질 빚도 1차로는 제이오션중공업의 장부에 섭니다.
대주주가 HJ중공업을 두고 해 온 일을 날짜순으로 놓으면 이 구도가 더 또렷해집니다. 2024년 말 66.9%였던 에코프라임마린퍼시픽의 지분은 2025년 8~9월 매각을 거치며 56.6%로 줄었습니다. 컨소시엄의 재무적 투자자 NH프라이빗에쿼티와 오퍼스프라이빗에쿼티가 지분매각청구권을 행사했고, 장내매도로 약 912억원이 회수됐습니다.
같은 무렵인 2025년 9월 12일 HJ중공업은 2,000억원 규모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했습니다. 새 주식은 전부 에코프라임마린퍼시픽이 받는 조건이었고, 그 돈은 HJ중공업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56.6%는 매각까지 반영한 숫자여서, 증자 뒤 대주주 몫이 어디서 멈췄는지는 이 계산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대주주는 HJ중공업의 자본을 채웠고, 같은 시기 대주주 쪽 지분 일부는 시장에서 팔렸고, 반년 뒤 큰 도크는 HJ중공업이 아닌 법인이 사들이는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셋 다 한 대주주에게서 나왔습니다. HJ중공업 안으로 들어온 것은 돈이었고, 도크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회사는 조선·건설·방산을 한 지붕에서 다 하는 회사라기보다, 한 투자자가 굴리는 여러 회사 가운데 하나로 읽어야 합니다.
300m 도크가 쥔 것은 길이로 살 수 없는 이력이다
300m 도크에는 길이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해군이 지금까지 발주한 검독수리-B 고속정 32척은 전부 HJ중공업이 수주했습니다. 1차 16척에 이어 2차 사업도 2025년 12월 17일 계약한 13~16번함 4척까지 HJ중공업 몫이었습니다. 방위사업청 입찰인데도 경쟁사로 넘어간 물량이 없습니다.
그 바닥에는 1974년 국내 해양방위산업체 1호로 지정된 뒤 쌓은 국내 최다 함정 건조실적이 있습니다. 영도에서는 2025년 7월 1,800억원을 들인 독도함 창정비·성능개량이 시작됐고, 국산 전투체계와 새 레이더를 얹어 2027년 해군에 다시 넘길 예정입니다.
2026년 1월 5일에는 미 해군 함정 정비 협약(MSRA)으로 가는 마지막 절차인 항만시설보안평가를 영도조선소에서 통과했습니다. 미 해군 함정 정비는 아무 조선소나 입찰할 수 없고, 현장 기술검증과 보안평가를 거쳐 이 협약을 받아야 들어가는 시장입니다. 유상철 대표는 “미 해군 MRO 시장은 우리 조선업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해군과 미 해군이 보는 것은 도크 길이가 아니라 수십 년 쌓인 실적과 보안 검증입니다. 그 이력은 영도에 쌓였고, 영도는 HJ중공업의 것입니다.
상장사 HJ중공업 매출의 절반 가까이는 배가 아니라 건물에서 나옵니다. 2026년 반기보고서 기준 조선 53.38%, 건설 45.97%입니다. 해모로 아파트와 연 7천억원대 공공공사 수주가 건설 쪽을 받치고, 시공능력평가 순위는 2001년 7위에서 2018년 41위까지 내려갔다가 2026년 31위로 올라왔습니다. 2025년 10월 국토교통부가 공개한 최근 6개월 하자 판정 건수에서 154건으로 전체 건설사 중 가장 많았던 것도 이 건설 쪽 장부의 일입니다.
이번 6,790억원 4척은 그 회사가 받은 주문입니다. 20여 년 전 도크 밖에서 선체를 이어 붙이던 조선소가, 같은 도크를 두고 설계를 키워 가며 오세아니아 선주의 계약서까지 왔습니다.
수빅 때 한진중공업을 무너뜨린 것은 바다 건너 조선소가 아니라 그 조선소와 본사를 이은 보증이었습니다. 군산의 700m 도크는 처음부터 HJ중공업 밖에 섭니다. 이 회사의 다음 장은 군산과 HJ중공업 사이에 놓일 줄이 주문이 될지, 보증이 될지에서 쓰입니다.
2026년 9월 24일 기준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한 필자의 관점이며, 매수·매도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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