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엔진 부품사 케이프는 증권사를 샀고, 그 증권사 대표가 케이프를 샀다
배 엔진 부품사 케이프는 증권사를 샀고, 그 증권사 대표가 케이프를 샀다
큰 배의 엔진 안에는 피스톤이 위아래로 오가는 굵은 쇠 통이 줄지어 서 있다. 연료가 눌리고 터지는 자리를 감싸는 통, 실린더 라이너다. 엔진 하나에 5개에서 14개가 들어가고, 안쪽 벽이 닳기 때문에 5~7년마다 새것으로 갈아 끼운다. 이 통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회사가 경남 양산의 케이프(064820)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30% 안팎이다.
그런데 케이프의 2025년 연결 매출 5,798억원 가운데 5,040억원은 실린더 라이너가 아니라 증권사에서 나왔다. 케이프가 2016년에 사들인 케이프투자증권, 옛 LIG투자증권이다. 그리고 2020년부터 케이프의 최대주주는 템퍼스인베스트먼트다. 이 회사를 지배하는 템퍼스파트너스의 최대주주가 당시 케이프투자증권 대표였던 임태순이다.
케이프를 배 엔진 부품 회사가 증권사를 하나 품은 곳으로 보면 반만 본 것이다. 돈의 크기로 보나 주인이 나온 자리로 보나, 지금의 케이프는 증권사가 실린더 라이너 공장을 거느린 회사에 더 가깝다. 10월 8일 케이프가 낸 합병 종료 보고서도 공장과 증권사 사이에 끼어 있던 중간 회사 하나를 없앤 기록이다.
현대중공업과 함께 시작한 쇠 통 하나
케이프는 1983년 세워졌다. 1991년 현대중공업과 기술협약을 맺고 제조공장을 세웠고, 이듬해부터 현대중공업에 실린더 라이너를 납품했다. 2007년 코스닥에 올랐고, 2008년 양산에 쇳물을 부어 통을 뜨는 주물공장과 그 통을 정밀하게 깎는 가공공장을 갖췄다. 쇳물을 붓는 일부터 마지막 가공까지 한 회사가 다 하는 곳은 국내에서 케이프 하나다.
회사 연혁의 굵은 줄은 대부분 승인이다. 1996년 스위스 술처(Sulzer)의 디젤엔진 제작 허가를 받았고, 2009년과 2013년 독일 만에너지솔루션(MAN Energy Solutions)의 소재 승인을, 2013년과 2016년 스위스 윈지디(WinGD)의 엔진 승인을 받았다. 큰 배 엔진은 도면을 쥔 몇몇 설계 회사의 기준대로 지어진다. 이 회사에서 승인 하나는 그 도면으로 짓는 엔진에 통을 댈 자격이고, 그래서 연혁이 곧 판로의 목록이다.
손님은 몇 곳에 몰려 있다. 2024년 3분기 기준 매출의 51.6%가 HD현대중공업 그룹, 23.5%가 한화엔진, 7.4%가 만에너지솔루션에서 나왔다. 국내 엔진 회사 두 곳이 매출 4분의 3을 쥔다. 라이너는 새 배가 지어질 때 엔진과 함께 한 번 팔리고, 그 배가 바다를 다니는 동안 5~7년마다 또 팔린다. 라이너가 한 번 들어간 엔진이 오래 손님으로 남는 장사다. 그래도 첫 판매는 조선소에 새 배 주문이 들어와야 생긴다.
경기를 타는 통, 그래서 금융을 샀다
2015년 김종호 당시 대표는 "우리의 주력사업인 실린더라이너는 업종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인수합병으로 성장동력을 찾겠다고 했다. 그 무렵 케이프의 눈은 공장 밖을 향해 있었다. 2012년에는 페이스북에서 돌아가는 게임을 만드는 소셜인어스 지분 72%를 사들였고, 이 회사는 2015년 7월 카지노 게임 '챔피언스클럽 카지노'를 내놨다. 2013년에는 한국토지신탁을, 2014년에는 아이엠투자증권을 사려다 둘 다 놓쳤다.
세 번째 금융사에서 손에 쥐었다. 2016년 6월 케이프는 KB손해보험이 가진 LIG투자증권 지분 82.35%를 1,300억원에 샀다. 그해 상반기 케이프의 매출은 100억원, 영업이익은 300만원이었다. 반년 매출의 13배를 치르고 증권사를 산 것이다. LIG투자증권은 2015년 순이익 85억원을 낸 회사였다.
돈은 여러 층을 거쳐 들어갔다. 케이프가 100% 가진 케이프인베스트먼트가 사모펀드 케이프2016사모투자합자회사를 만들고, 그 아래 투자목적회사 이니티움2016을 세워 지분을 샀다. 인수자금 절반은 산은캐피탈 같은 외부 투자자에게서 끌어왔고, 중간 순위 돈의 금리는 연 7.5%였다. 케이프는 케이프인베스트먼트에 300억원대를 빌려줬다. 공장 회사가 몸집보다 큰 증권사를 사려고 사다리를 세 칸 놓았고, 그 맨 위 칸이 이번에 합병된 케이프인베스트먼트다.
자회사 대표가 모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2020년 케이프 주식을 사 모으는 쪽이 생겼다. 중형 조선소 대한조선의 대주주인 KHI와 김광호 회장 쪽이다. 1월과 2월에 지분을 몰아 산 KHI는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배당 확대와 사외이사·감사 추천을 담은 주주제안을 냈다. 6월 KHI 쪽 지분은 전환권 행사분을 빼고 9.8%였다.
6월 12일 김종호 회장과 부인 백선영 씨는 보유 주식 522만7,798주를 템퍼스인베스트먼트에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 주당 7,630원, 모두 399억원으로 경영권 프리미엄이 91.71%였다. 템퍼스인베스트먼트를 지배하는 템퍼스파트너스의 최대주주(지분 70.59%)가 케이프투자증권 대표 임태순이었다. 거래가 끝나자 템퍼스 쪽 지분은 23.75%가 됐다.
창업주는 회사를 KHI가 아니라 자기 회사가 산 증권사의 대표 쪽에 넘겼다. 1,300억원을 들여 사들인 자회사에서 모회사의 주인이 나왔다. KHI 쪽은 그해 10월 지분을 17.89%까지 늘렸지만, 2021년 3월 주주총회에서는 임 대표 쪽이 우위를 지켰다. 2021년 11월 기준 지분은 템퍼스 쪽 29.04%, KHI 쪽 16.8%였다. 2025년에도 템퍼스인베스트먼트는 30%대 지분으로 케이프 위에 있다.
매출 열에 아홉 가까이가 증권사 몫이다
2025년 케이프의 연결 매출은 5,798억원, 영업이익은 500억원, 순이익은 642억원이었다. 같은 해 케이프투자증권의 영업수익은 연결 기준 5,040억원, 영업이익은 377억원이다. 단순히 빼면 남는 매출은 758억원이다. 세계 시장 30%를 쥔 라이너 사업이 회사 전체 매출에서는 열에 하나를 조금 넘는다.
그래서 케이프의 한 해 성적은 증권사가 정한다. 케이프투자증권의 영업이익은 2021년 513억원에서 2022년 3,961만원으로 꺼졌다. 힘을 모았던 IB와 자기 돈으로 주식·채권을 사고파는 자기매매가 기대에 못 미쳤다. 같은 2022년 케이프의 연결 영업이익은 24억원이었다. 증권사 이익이 2023년 약 200억원, 2024년 약 210억원, 2025년 377억원으로 돌아오는 동안 케이프 연결 영업이익도 410억원, 390억원, 500억원으로 따라왔다.
이 증권사가 돈을 버는 방식은 증시의 날씨를 그대로 탄다. 2025년 1분기 영업수익 1,002억원 가운데 529억원이 들고 있는 증권의 값이 오르거나 그것을 팔아서 생긴 이익이었다. 개인 고객 주식을 맡아 받는 예탁수수료는 2018년 108억원에서 2023년 3분기 누적 23억원으로 줄었다. 2021년 M&A; 수수료는 452억원이었다. 개인 주문을 받아 수수료를 버는 증권사가 아니라 회사 돈으로 투자하고 기업 거래를 거드는 증권사다.
증권사 이익이 돌아오는 동안 케이프의 주당 배당금은 2023년 100원, 2024년 300원, 2025년 400원으로 늘었다. 그 사이 2024년 12월 케이프는 케이프인베스트먼트에 빌려준 돈 819억원을 그 회사 주식으로 바꿔 넣었다. 증권사를 사려고 세운 사다리에 빌려준 돈이 출자금이 됐다.
10월 8일, 공장과 증권사 사이의 한 칸이 사라졌다
케이프는 7월 15일 케이프인베스트먼트를 흡수합병하기로 했다. 9월 30일 합병했고, 10월 8일 합병 종료 보고서를 냈다. 등기는 10월 14일이다. 이미 100% 가진 회사를 합치는 것이라 합병비율은 1 대 0이고 새 주식은 한 장도 나오지 않는다. 주주의 지분율도 그대로다. 회사 규모에 비해 작은 합병이라 주주가 회사에 주식을 사 달라고 할 권리도 생기지 않았다.
사라진 케이프인베스트먼트는 작은 회사가 아니었다. 케이프2016 펀드와 이니티움2013 펀드를 운용해 왔고, 2025년 순이익이 394억원이었다. 회사가 밝힌 합병 이유는 "금융투자업과 제조업 부문의 인적·물적 자원을 통합"해 관리 비용을 줄이고 의사결정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것이다. 그 문장에서 두 사업의 순서는 금융투자업이 먼저, 제조업이 나중이다. 증권사를 팔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현재 추가적인 매각이나 특별한 후속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2015년 케이프가 금융사를 찾아 나선 이유는 라이너가 조선 경기를 탄다는 것이었다. 10년이 지나 케이프의 성적표를 흔드는 것은 조선소의 도크가 아니라 증권사가 제 돈으로 사 둔 증권의 값이다. 케이프는 경기를 피한 것이 아니라 타는 경기를 바꿨고, 그 바꾼 경기 한복판에 있던 사람이 회사의 주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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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합병등종료보고서(2026.10.08), 합병 일정·합병비율·피합병회사와 케이프 2025년 재무(2026.07.15), 무증자 소규모합병·합병 목적(2026.07.15), 케이프투자증권 2025년 실적·합병 설명·매각 계획(2026.07), 케이프 연혁, 실린더 라이너의 역할·교체 주기·소셜인어스·김종호 대표 발언(2015.11.03), 한국토지신탁·아이엠투자증권 인수 시도(2015), 엔진당 라이너 개수·고객(2025.08.28), 세계 점유율·2024년 3분기 고객 비중(2024.11), 국내 유일 일괄 생산체제(2025.09.26), LIG투자증권 인수 구조와 자금(2020.06.15), 2016년 상반기 실적·LIG투자증권 순이익(2016.08.16), KHI 지분·경영진 인수(2020.06.15), 창업주 지분 매각 조건(2020.06.16), 경영권 프리미엄·템퍼스 지배구조(2020.07.15), KHI 주주제안(2020.03.25), KHI 쪽 지분 17.89%(2020.10.09), 2021년 주총·지분 구도(2021.11.11), 대한조선 대주주 KHI·템퍼스 지분(2025.06), 819억원 출자전환(2024.12.12), 케이프 연도별 연결 실적, 케이프투자증권 2021~2023년 실적·수수료 구조(2024.03.13), 케이프투자증권 2025년 1분기 수익 구성(2025.05.20), 주당 배당 추이(2026.07). 공시 계기: 2026.10.08 합병등종료보고서(합병).
작성 기준일 2026년 10월 9일. 매출·이익은 회사 공시와 보도에 나온 수치입니다. 라이너 쪽 매출 758억원은 케이프 연결 매출에서 케이프투자증권 연결 영업수익을 단순히 뺀 값으로, 내부 거래 조정에 따라 실제 부문 매출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세계 점유율과 고객 비중은 2024년 증권사 분석 기준입니다. 지분율은 각 문장에 적은 시점 기준입니다. 사업 구조에 관한 필자의 해석을 포함합니다. 매수·매도 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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