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오션, 닭 파는 그룹의 배당 절반을 배가 번다
9월 28일 팬오션(028670) 주가는 전날보다 2.14% 오른 5,720원에 거래됐고, 거래량은 100만 주를 넘었습니다. 팬오션의 최대주주는 지분 54.90%를 가진 하림지주와 특수관계인입니다. 하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닭고기와 치킨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2023년 말 하림지주가 계열사에서 받은 배당 838억원 가운데 439억원이 팬오션 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52.39%입니다. 하림그룹의 곳간을 채우는 것은 닭이 아니라 배입니다.
처음엔 사료 원료를 싸게 들여오려고 산 해운사였습니다. 지금 이 회사가 돈을 버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남의 원유와 가스를 몇 년 단위로 실어 주기로 미리 약속하고, 그 약속에서 나온 돈이 지주회사로 올라갑니다.
투자 참고용 정리입니다. 작성 기준일 2026년 9월 28일.
하림지주 이름으로 올라온 초대형 유조선 계약
9월 28일 하림지주는 자회사 팬오션이 트라피구라 마리타임 로지스틱스와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1척에 대한 장기대선계약을 맺었다고 공시했습니다. 팬오션이 배를 통째로 내주고, 빌린 쪽이 그 배에 원유를 싣는 계약입니다.
기간은 2026년 12월 1일부터 2029년 12월 1일까지 최소 36개월입니다. 트라피구라 쪽이 원하면 39개월까지 늘어납니다. 배를 빌린 값은 매달 한 번, 먼저 받습니다.
계약금액은 1억960만달러입니다. 이날 환율 달러당 1352원으로 바꾸면 1481억7920만원이고, 팬오션의 지난해 연결 매출 5조4328억원의 2.73%입니다. 하루 대선료에 36개월을 곱해 나온 금액이라, 날수로 나눠 보면 하루 약 10만달러꼴입니다.
이 배의 기존 대선계약은 12월 1일에 끝납니다. 새 계약은 바로 그날 시작합니다. 배가 부두에서 다음 손님을 기다리는 날이 없습니다.
이 계약의 무게는 금액보다 기간에 있습니다. 운임이 시황에 따라 오르내리는 바닷길에서, 한 척의 3년치 수입을 지금 정해 둔 것입니다. 이런 계약이 쌓인 회사가 어떤 돈을 만들어 내는지는 하림지주의 장부에서 보입니다.
하림지주가 받는 배당의 절반이 이 배들에서 나옵니다
2023년 말 하림지주의 배당수익은 838억원입니다. 그중 439억원(52.39%)이 팬오션 배당이었습니다. 닭고기·사료·가공식품 계열사를 다 합친 것보다 해운사 한 곳이 더 많이 올려 보냈습니다.
매출로 봐도 비슷합니다. 2020년 4월 분석에서 하림지주 계열사 총 매출의 43.6%를 팬오션이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바다가 흔들리면 그룹이 같이 흔들립니다. 팬오션의 연결 매출은 2022년 6조4203억원에서 2023년 4조3610억원으로 2조원 넘게 줄었습니다. 이 시기 하림그룹 전체 실적과 하림 주가도 함께 내려앉았습니다.
하림의 얼굴은 치킨이고, 지갑은 배입니다. 저는 팬오션을 이렇게 읽습니다. 사료회사가 거느린 물류 자회사가 아니라, 식품 그룹의 현금을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사료회사가 부채비율 1925%의 해운사를 산 이유
이 기둥은 한 번 무너졌던 회사입니다. 출발은 1966년 5월 세워진 '범양전용선'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5만4000DWT급 유조선 4척으로 국내 처음 원양 대형 유조선 운항을 시작했습니다.
1984년 '범양상선'으로 이름을 바꿨고, 2004년 STX그룹에 인수돼 'STX팬오션'이 됐습니다. 2005년 싱가포르, 2007년 한국거래소에 상장했습니다.
2013년 6월 부채비율이 1925%까지 치솟자 법정관리를 신청했습니다. 갚아야 할 돈이 자기 돈의 19배를 넘었습니다.
2015년 이 회사를 산 곳은 해운 전문 자본이 아니었습니다. 하림그룹이 사모펀드 JKL파트너스와 함께 1조80억원에 인수했습니다. 그 돈의 절반 이상은 빌려서 마련했고, JKL은 약 1750억원을 넣었습니다. 사명은 '팬오션'으로 돌아왔고, 인수 두 달 뒤인 2015년 7월 회생절차를 조기 종결했습니다. 법정관리 신청 2년여 만입니다.
하림이 내건 이유는 곡물이었습니다. 사료와 축산을 하는 계열사는 해마다 곡물을 대량으로 사들입니다. 여기에 팬오션의 배를 붙여 '한국판 카길'이 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첫 장면은 2016년 인천항에서 나왔습니다. 브라질 산토스항에서 실은 남미산 옥수수 7만1500톤을 8만1500톤급 벌크선 '피오렐라호'가 싣고 와 인천항 TBT 곡물 엘리베이터에 부렸습니다. 31만5000톤 계약분 중 첫 물량이었습니다.
당시 팬오션 관계자는 “곡물유통사업은 우리나라에 꼭 필요하지만 해운기반과 곡물 엘리베이터 운영경험 등을 가진 팬오션만이 잘 해낼 수 있는 사업”이라고 말했습니다.
곡물은 4년 내리 적자였는데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 곡물 트레이딩 사업은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2016년 14억원, 2017년 25억원, 2018년 7억원, 2019년 16억원. 4년 내리 적자였습니다.
같은 시기 추성엽 당시 팬오션 사장은 오히려 판을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본보기로 든 곳이 카길입니다. “카길은 막대한 내부 물량에 대한 운송 통제권을 쥐고자 자체 해운사업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면서 가격 협상에 활용하는 '오퍼레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고 2017년 4월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적자를 견딘 이유가 들어 있다고 저는 봅니다. 곡물 장사로 남기는 이문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룹이 사들이는 곡물을 누가, 어떤 배로, 얼마에 나르는지를 쥐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배를 가진 쪽은 운송을 남에게 맡기는 쪽보다 협상 테이블에서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림지주로 올라가는 현금은 이 곡물 사업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돈은 다른 곳, 몇 년짜리 약속으로 묶인 배들에서 나옵니다.
돈은 정해진 배가 정해진 짐을 싣는 약속에서 나옵니다
팬오션은 국내 1위 벌크선사입니다. 곡물·철광석·석탄처럼 마른 화물을 싣는 벌크선을 직접 81척 갖고 있고, 남의 배를 빌려 쓰는 것까지 더하면 상반기 기준 벌크선단만 301척입니다.
직접 가진 81척 중 41척은 화주와 장기계약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 41척은 시황과 상관없이 해마다 약 1억달러의 영업이익을 냅니다. 벌크선 운임지수(BDI)가 1200~1300포인트 아래로 내려가면 손해라는 업계의 계산이 있는데, 이 배들은 그 지수를 보지 않고 돈을 법니다.
액화천연가스를 나르는 LNG선에서 이 방식은 더 길어집니다. 2021년 7월 팬오션은 쉘(Shell)과 17만4000㎥급 LNG선 2척을 7년간 빌려주는 3648억원 규모 계약을 맺었습니다. 연장하면 최장 13년입니다. 2020년 12월 같은 사양 2척을 계약하면서 붙여 둔 옵션을 쉘이 행사한 것이고, 이로써 쉘에 빌려준 LNG선은 4척이 됐습니다.
한국가스공사와의 인연은 더 깁니다. 15만3000㎥급 LNG선 'LNG KOLT호'는 2008년 12월부터 오만·호주·미국 등의 선적항에서 국내 LNG 인수기지까지 해마다 약 150만㎥의 LNG를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화주가 그때그때 싼 배를 구하지 않고 몇 년짜리 계약을 맺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특정 항로, 특정 화물에 맞는 배를 정해진 기간 동안 확실히 확보하고 싶어서입니다. 한번 묶이면 계약기간 동안 선사를 바꾸기도 어렵습니다. 팬오션 입장에서는 그 기간의 수입이 미리 정해집니다.
배를 오래 맡기려면 그 배가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최근에는 VLCC가 해킹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글로비스가 소유한 VLCC가 해킹 공격을 받은 정황을 미국 FBI가 조사 중이고, 선박 해킹은 항법·엔진·화물 제어 장비를 원격으로 건드립니다. 팬오션은 지난 5월 HMM·SK해운 등과 함께 SK텔링크로부터 저궤도 위성통신 '스타링크'와 사이버보안을 묶은 솔루션을 공급받는 계약을 맺었고, 자회사 포스에스엠을 통해 방화벽과 데이터베이스 접근 통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HMM을 놓친 뒤, 방향은 원유와 가스로 틀었습니다
하림의 해운 욕심은 벌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23년 12월 하림그룹은 산업은행·한국해양진흥공사가 가진 HMM 지분 57.9%를 인수할 우선협상대상자로 뽑혔습니다. 하림의 자산 17조원에 HMM의 25조8000억원을 더하면 42조8000억원이었습니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그 무렵 “(밸류체인 강화는)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고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협상은 2024년 2월 결렬됐습니다. 하림은 최대주주가 되고도 독자적인 경영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고, 정부는 HMM이 국적선사라는 이유로 독자 경영권 보장에 반대했습니다. 컨테이너선까지 품으려던 계획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2026년 팬오션이 향한 곳은 원유였습니다. 2월에는 SK해운의 VLCC 10척을 9737억원에 사기로 했습니다. S-Oil 등 국내 화주와 맺은 장기 운송계약이 배와 함께 넘어오고, 2027년 4월까지 차례로 인수합니다. 배만 산 것이 아니라 그 배에 딸린 고객과 수년치 일감을 같이 샀습니다.
5월에는 VLCC 4척을 7834억원에 새로 발주했습니다. 2027년 하반기부터 인도됩니다. 이렇게 해서 VLCC는 2026년 2분기 5척에서 2027년 14척으로 늘어납니다. LNG선은 13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숫자도 따라오고 있습니다. 2026년 1분기 매출은 LNG와 곡물 사업이 늘면서 1년 전보다 8.3% 많은 1조5089억원, 영업이익은 1409억원이었습니다. 2분기 영업이익은 1937억원으로 57.4% 늘었습니다. 유진투자증권은 올해 탱커 부문이 영업이익 1928억원, LNG선이 약 1600억원을 낼 것으로 추정합니다. LNG선의 영업이익률은 40%대로 봅니다.
곡물 시황에 목을 매던 벌크선사가 원유와 가스를 몇 년씩 약속받고 나르는 회사로 무게를 옮기고 있습니다. 오늘 트라피구라와 맺은 3년짜리 계약도 그 흐름 위에 놓인 한 척입니다.
1967년 이 회사가 처음 한 일은 원양 유조선 4척을 띄우는 것이었습니다. 사료 곡물을 실어 오라고 하림이 사들인 회사가, 60년 만에 다시 원유를 실어 주는 값으로 하림의 배당 절반을 만들고 있습니다.
작성 기준일 2026년 9월 28일. 이 글은 매수·매도 권유가 아닙니다.
출처: DART 단일판매ㆍ공급계약체결(2026-09-28) · 파이낸셜뉴스(2026-09-28) · 매일경제(2026-09-27) · IB토마토(2024-06-20) · 뉴스워커(2020-04-09) · 서울신문(2013-06-08) · 이데일리(2016-02-11) · 이데일리(2017-04-05) · 이투데이(2021-07-14) · 한국가스공사 · 이투데이(2023-12-18) · 딜사이트(2024-02-07) · 아시아경제(2026-02-11) · 네이트뉴스(2026-05-14) · 파이낸셜뉴스(2026-09-17) · 위키백과 팬오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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