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파이브, 모빌린트 로봇용 AI 칩을 사양서만 받고 양산까지 맡는다
10월 1일 세미파이브(490470) 주가는 전날보다 10.84% 오른 20,250원에 거래됐습니다. 거래량은 738만 주로 직전 20거래일 평균의 6.5배였습니다.
같은 날 세미파이브는 AI 반도체 회사 모빌린트와 산업용 로봇에 들어갈 칩을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모빌린트는 이 칩의 설계도를 그려 오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성능과 사양만 적어 건넸습니다.
세미파이브는 자기 칩이 없는 반도체 회사입니다. 남이 적어 준 사양을 실제 칩으로 바꿔 내주는 일이 이 회사의 물건입니다. 이 일을 한국에서 처음 벌인 곳은 미국 반도체 설계 회사 사이파이브(SiFive)였고, 사이파이브는 지금도 세미파이브의 최대주주입니다. 그런데 회사를 움직이는 표는 사이파이브가 아니라 세미파이브 경영진 손에 있습니다.
투자 참고용 정리입니다. 작성 기준일 2026년 10월 1일.
모빌린트는 설계도 대신 사양서를 들고 왔습니다
이번 계약은 산업용 로봇에 넣을 AI 반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맡는 턴키 개발입니다. 산업통상부의 'K-온디바이스 AI 반도체 기술개발' 사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국내 AI 반도체 회사와 그 칩을 쓸 회사가 짝을 지어 칩을 만들고, 실제 제품에 넣어 시험한 뒤 상용화까지 잇는 사업입니다.
칩이 일할 곳은 서버와 연결이 잘 안 되는 야외입니다. 농업 로봇 같은 기계에 들어가 카메라 영상과 센서 데이터를 그 자리에서 바로 처리합니다. 통신이 안 닿는 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칩입니다.
그래서 부품 사양이 높습니다. 전기를 적게 먹는 D램 규격 LPDDR6, 고속 연결 규격 PCIe 6.0을 씁니다. 작은 칩 여러 개를 한 덩어리로 묶어 서로 빠르게 데이터를 주고받게 하는 UCIe-S도 들어갑니다. 전기를 아끼면서 많은 영상을 빨리 처리하려는 조합입니다.
이 계약에서 눈여겨볼 것은 일하는 방식입니다. 세미파이브는 이를 '스펙 핸드오프(Spec Hand-off)'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는 고객이 설계를 상당 부분 끝낸 뒤 나머지 공정을 맡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고객이 목표 성능과 사양만 내고, 상세 설계부터 패키징·테스트·양산까지 세미파이브가 다 합니다.
모빌린트는 처음 온 손님도 아닙니다. 퓨리오사AI·리벨리온·하이퍼엑셀·엑시나와 함께 세미파이브의 국내 AI 반도체 고객 명단에 이미 올라 있습니다. 한 번 거래한 고객이 이번에는 설계까지 넘겼습니다. 고객이 손을 덜 댈수록 세미파이브가 맡는 공정은 길어집니다.
사양서가 칩이 되기까지, 세미파이브는 공장만 빼고 다 맡습니다
세미파이브 뭐하는 회사냐고 물으면 답은 이 순서에 있습니다. 고객과 사양을 정하고, 회로를 설계하고 검증합니다. 생산은 삼성전자나 TSMC 같은 파운드리 공장에 맡깁니다. 다 만든 칩은 패키징과 테스트를 거쳐 완성품으로 고객에게 넘어갑니다. 공장만 없을 뿐, 칩 한 개가 태어나는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갑니다.
빨리 끌고 가는 데 쓰는 도구도 따로 있습니다. AI 추론, 사물인터넷 기기, 고성능 컴퓨터용으로 미리 짜 둔 설계 틀이 있고, 여기에 자회사 Analog Bits의 아날로그 부품 설계를 끼워 맞춥니다. 매번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으니 설계 기간이 줄어듭니다.
이렇게 나온 칩은 이미 여러 곳에서 돌고 있습니다. 2023년 4월에는 퓨리오사AI의 1세대 AI 반도체 '워보이'가 삼성 14나노 공정에서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AI 추론 서버에 들어가는 칩입니다.
2026년 9월 8일에는 하이퍼엑셀의 거대언어모델 추론 가속기 '베르다'가 삼성 4나노 공정에서 첫 대규모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면적이 500㎟를 넘는 큰 칩이고, 데이터센터 서버에 실립니다. 칩이 클수록 한 장의 웨이퍼에서 건지는 개수가 적어 만들기 까다롭습니다.
AI와 거리가 먼 고객도 있습니다. 한화비전 보안카메라에 들어가는 반도체도 세미파이브가 설계합니다. 조명현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로벌 빅테크든 스타트업이든 자기 반도체 없이 혁신하기가 힘듭니다”.
개발비를 받는 용역 회사처럼 들리지만 매출 구성은 다릅니다. 2024년 매출을 나눠 보면 제품매출이 87.2%, 용역매출이 12.6%, 기타가 0.2%입니다. 설계에서 손을 떼지 않고 완성 칩을 넘기는 데까지 가는 회사라서 나오는 구성입니다.
그 해 연결 매출은 1,118억 원으로, 전년 713억 원보다 57% 늘었습니다. 창립 5년 만에 1,000억 원을 넘겼습니다. 2026년 1분기에는 해외 매출이 60%를 넘었고, 북미와 일본이 중심입니다.
고객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 일의 성격에 있습니다. 칩이 테이프아웃, 곧 설계를 확정해 공장에 넘기는 단계까지 가면 그 설계는 특정 파운드리 공정과 Analog Bits 부품에 맞춰져 있습니다. 양산 도중에 설계 파트너를 바꾸면 그 맞춤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세미파이브 최대주주는 이 일을 한국에 처음 들여온 회사입니다
세미파이브의 출발점은 2018년 10월 세워진 '사이파이브코리아'입니다. 미국 사이파이브가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고 만든 회사입니다. 사이파이브는 RISC-V라는 칩 설계 방식으로 반도체의 핵심 설계 블록을 만들어 파는 회사입니다.
세미파이브의 설계 플랫폼도 처음에는 사이파이브의 RISC-V 설계 블록을 실제 칩으로 구현하는 역할에서 시작했습니다. 남의 설계를 칩으로 옮기는 손, 그것이 이 회사의 첫 직업이었습니다.
2019년 5월 조명현 대표와 박성호 전 삼성전자 부사장이 이를 바탕으로 세미파이브를 세웠습니다. 조 대표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MIT에서 석·박사를 받았습니다.
지금 지분표가 이 회사에서 제일 특이한 대목입니다. 사이파이브는 상장 뒤에도 지분을 팔지 않고 최대주주 자리를 지켰습니다. 보도 시점에 따라 14.8%에서 18.5%로 숫자가 갈립니다. 그러면서 의결권은 세미파이브 경영진에게 넘겼습니다. 실제 경영권은 조명현 대표가 쥡니다.
회사를 낳은 쪽이 주식은 쥐고 운전대는 놓았습니다. 상장을 앞둔 2025년 7월에는 조 대표의 경영 안정성이 관건으로 꼽혔습니다. 의결권 위임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됐습니다.
세미파이브는 2025년 12월 29일 코스닥에 상장했습니다. 세미파이브 공모가는 24,000원이었습니다.
운전대를 넘겨받은 뒤의 고객 명단을 보면 이 회사가 어디로 왔는지 보입니다. 퓨리오사AI·하이퍼엑셀·모빌린트 같은 국내 AI 칩 회사, 한화비전, 그리고 미국의 새 고객까지. 사이파이브의 한국 창구로 시작한 회사가 이제 여러 회사의 칩을 받아 만듭니다.
설계 쪽 뿌리가 사이파이브라면, 공장 쪽 뿌리는 창업 3년차에 사들였습니다
2022년 12월, 창업 3년차 세미파이브가 미국 회사 하나를 통째로 샀습니다. 1995년 실리콘밸리에서 세워진 Analog Bits입니다. 지분 100%를 6,000만달러에 가져왔습니다. 인수 당시 Analog Bits는 27년 된 회사였습니다.
Analog Bits가 해 온 일이 이 인수의 무게를 정합니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TSMC·인텔파운드리서비스·글로벌파운드리에 아날로그 반도체 설계 블록을 대 왔습니다. 세계 주요 파운드리가 모두 고객이었습니다. TSMC의 3나노 공정 테스트에도 Analog Bits의 설계가 쓰였습니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사이파이브는 세미파이브에 칩의 두뇌 쪽 설계를 물려줬습니다. Analog Bits는 칩이 공장 공정 위에서 제대로 돌게 만드는 쪽을 채웠습니다. 고객 칩에 끼울 아날로그 부품을 세미파이브는 이제 자회사에서 꺼내 씁니다.
그 부품은 돈도 따로 법니다. 2026년 1분기에는 ASIC 개발 매출과 함께 Analog Bits의 설계 블록 매출도 늘었습니다. 고객 칩을 만들어 주는 일과, 파운드리 생태계에 부품 설계를 파는 일이 한 지붕 아래 있습니다.
업계가 '대행사'라 부르는 회사에 미국 고객이 703억 원을 맡겼습니다
세미파이브 같은 회사를 반도체 업계는 디자인하우스라고 부릅니다. 평가는 차갑습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디자인하우스는 파운드리 출신 인력 중심의 공정 최적화 대행사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칩의 구조를 주도하기보다 고객이 짠 설계를 공장 공정에 맞게 다듬는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조 대표의 말은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디자인하우스'를 넘어 설계를 표준화·자동화하는 '디자인 플랫폼' 회사로 진화하고 있다”. 업계에서도 브로드컴·마벨처럼 맞춤형 칩 전문 회사로 넓혀 가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이 함께 있습니다.
비교 대상으로는 대만의 패러데이(Faraday Technology), 알칩(Alchip Technologies), TSMC 계열 글로벌유니칩(GUC)이 꼽힙니다.
대행사인지 플랫폼인지는 말이 아니라 고객이 무엇을 넘기느냐가 가릅니다. 설계를 다 해 온 고객의 일을 다듬으면 대행이고, 사양서만 받아 칩을 내면 설계를 맡은 것입니다. 모빌린트 계약은 회사가 스스로 뒤쪽이라고 정의한 첫 사례로 남습니다.
9월 29일에는 미국의 새 AI 팹리스 고객과 5,200만달러(약 703억 원) 계약을 맺었습니다. 단일 계약으로는 세미파이브 역대 최대입니다. 2027년 상반기 테이프아웃, 2028년 양산이 목표입니다. 회사는 이 고객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세미파이브 전망을 가를 일정은 둘입니다. 미국 고객의 칩이 2027년 상반기에 설계를 확정해 공장으로 가는지, 모빌린트 로봇용 칩이 국책 사업 안에서 실제 로봇에 실려 시험을 통과하는지입니다.
사이파이브가 한국에 세운 것은 자기 설계를 칩으로 옮겨 줄 손이었습니다. 7년 뒤 그 손을 가진 회사에서 최대주주는 운전대를 넘겼고, 고객은 설계도 대신 사양서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 디지털데일리, 세미파이브-모빌린트 로봇용 AI 반도체 개발 (2026-10-01)
- DART, 단일판매ㆍ공급계약체결 (2026-10-01)
- DART, 단일판매ㆍ공급계약체결 (2026-09-29)
- 한국경제, 세미파이브 신규 고객 상대로 703억 역대 최대 수주 (2026-09-29)
- 전자신문, 조명현 세미파이브 대표 인터뷰 (2026-09-29)
- 한국경제, 세미파이브 삼성 4나노 기반 AI 추론 가속기 양산 (2026-09-08)
- 블로터, 세미파이브 디자인하우스 한계…ASIC 전환 숙제 (2026-03-04)
- 네이트 뉴스, 조명현 대표 인터뷰 (2026-01-24)
- 더벨, 최대주주 사이파이브 상장 이후에도 지분 유지 (2025-12-17)
- 더벨, 최대주주 미국 SiFive…조명현 대표 '경영 안정성' 관건 (2025-07-23)
- 세미파이브 뉴스룸, 창립 5년 만에 1,000억 원 이상 매출 달성 (2025-03-26)
- 더구루, 세미파이브 인수 아날로그비츠 TSMC향 초미세공정 설계 개발 (2024-04-26)
- 디지털데일리, 세미파이브-퓨리오사 AI 반도체 양산 (2023-04-05)
- 38커뮤니케이션, 세미파이브 공모주 분석
작성 기준일: 2026년 10월 1일. 이 글은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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